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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부터 새벽 1시, 시차를 거슬러 일한다는 것.

 

4 to 1. 내 근무시간이다. 다들 4 to 1이 무슨 말인지 헷갈려했고, 9 to 6라는 보편적인 업무 시간이 아닌 오후 4시부터 새벽 1시까지 일한다는 의미라고 덧붙여야 했다. 올해 초에 해외 기업에 원격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내 생활 패턴은 거의 붕괴되고 재탄생 되었다. 유럽과는 시차 맞추기 그리 어렵지 않았는데, 미국이 거의 14시간 정도가 차이가 나다보니 통화를 받으려면 아침 일찍 시간대나 늦은 밤 시간대를 무조건 포함시켜서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나온 시간대였다. 그리고 곧 다시 시차가 훨씬 가까운 나라의 팀과 일하게 되어서 다시 생활 패턴을 옮기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런 다른 시차살이를 한지 어느덧 6개월 차. 처음 생각한 생활과 다른 부분도 있고, 시작할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도 많았다. 사실 이번주부터는 다른 팀과 일을 하게 되면서 다시 아시아 시차로 돌아가게 되었고, 짧은 6개월 동안 다른 시차살이를 돌아보면서 몇 가지 발견한 점들, 생각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혹시 누군가 다른 시차살이를 시작하시는 분들이나 고민하시는 분들께 약간이나마 '티저'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1. 나한테 맞는 근무시간 찾기

재택으로 다른 시차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언제 어디서 일을 할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도 할 수 있고 어느정도 생활이 가능한 '나만의 timezone'을 만들어야한다는 의미였다. 나에게 맞는 시간대를 찾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처음에는 아침에 4시간, 밤에 4시간 일하는 방식으로 어느정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고, 밤 시간대에 주로 통화를 하는 쪽으로 했었다. 하지만 새벽 1, 2시까지 통화를 하고 씻고 자면 어느덧 3, 4시인데, 새벽형 인간인 나에게 늦게까지 깨어있고 일을 하는 것 자체는 무리가 아니었지만, 이 상태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거나 오전 9시 통화를 받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가장 최악이었던 것은 아침과 밤에 나눠서 4시간씩 일을 하고 그 중간 시간을 내 개인시간으로 쉬어야하는데, 아침에 일을 하다가 뚝 끊긴 채로 쉬려고 하니 결국에는 자꾸 일 생각을 하게 되고, 퇴근을 한 상태가 아니다보니 저녁에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또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정말 하루종일 일하는 기분이 들어서 시간대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저히 아침 일찍 일어나서 통화를 받을 엄두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좀 더 새벽형 인간으로 살기로 했다. 워낙에도 취침 시간이 2시 정도이고 야작으로 단련되어있기 때문에 늦게 일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후 4시 - 새벽 1시까지 일을 오후 시간대에 몰아서 하기로 했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대에 일을 하고 일부러 루틴처럼 만들고 나니 이제는 몸이 조금 적응을 해가는 것 같다. 늦은 밤 통화가 없는 날에도 사실 일을 일찍 시작하고 일찍 마무리해도 괜찮지만, 적어도 고정된 시간대에 몸과 마음을 적응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4 - 1을 고수해서 맞춰서 일하고 있다.  처음 시차를 바꿨을 때는 체력도 엄청 떨어지고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이제는 남들이 퇴근에 가까워지는 시간대에 출근을 하는게 나름 익숙하다.

 

 

2. '9 to 6' 라는 보편적인 업무 시간대가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아침잠이 많고, 누군가는 아이를 돌보고 조금 늦게 출근하는게 낫고, 다들 각자의 이유로 9 to 6라는 틀보단 유동성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탄력 근무제도 나오고, 근무 시간대를 조율할 수 있도록 하는 회사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대부분 오전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한다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 근데 이렇게 지내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나의 경우는 낮에 내 개인시간을 보내고 밤에 일을 했더니, 개인시간에 에너지를 먼저 쓰고 일을 하게 되면 밤에 에너지가 모자란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고 회사에 가는 건 힘든 일이지만, 어쨋튼 눈을 뜨고 가장 체력과 정신이 온전한 상태의 에너지를 일에 쏟아붓고, 남은 에너지로 개인적인 취미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게 회사 입장에서는 인력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에 그렇게 해온 것이 아닐까. 일을 하고 나서도 퇴근 후 휴식 후 잠드는 것과, 일에 지친 상태에서 에너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잠드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 똑같은 잠인데도, 무언가에 쫓겨 잠드는 것 같은 기분이라 그런지 잠을 자고도 피곤한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1시에 퇴근하면 씻고 곧바로 잤지만, 좀 적응이 되고 나서는 3시, 4시까지 유튜브라도 보고, 다른거라도 조금 하면서 퇴근한 기분을 좀 내고 자는게 잠은 더 짧게 자도 홀가분한 기분일 정도였다. 

 

 

4.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환상 -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찾아내야한다. 

남들이 놀 때 일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초반에는 집에서 일할 생각으로 인터넷도 바꾸고, 책상 모니터도 새로 세팅을 했는데, 결국에 선택하게 된건 코워킹 스페이스였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일하는 시간이 내 룸메이트가 퇴근한 시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방해가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서였다. 나도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친구도 맘편히 쉬지 못하고 신경을 써야 했다. 카페를 전전하며 일을 하기에는 와이파이 환경이나 주변 소음 때문에 zoom 통화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고, 한 카페에서 8시간을 일할 수도 없었다. 팀과 떨어져 혼자 일하다보니 그래도 주변에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환경으로 가야겠다, 해서 코워킹 스페이스 멤버쉽을 이용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월세도 나가는데 코워킹스페이스까지 돈을 내야한다고 하니 부담이 있긴 하지만 그게 내 일과 개인 모두에게 좋은 방법인 듯 했고,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미래의 업무 환경에 대한 영상들을 보면 다들 커피 한 잔 여유롭게 받아들고 카페나 코워킹스페이스에서 일하는 게 이상처럼 그려지지만, 나는 오히려 이번 경험으로 회의적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무실로 돌아가야된다는 것도 아니지만, 카페나 코워킹스페이스는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요소가 너무 많다. 나에게 최적화된 환경이 중요하지, 햇살 드는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처리하고 웃으면서 집으로 향하는 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일 뿐이다. 

 

 

5. 극강의 밸런스 게임 - 낮에는 반차를 쓴 듯한 행복, 밤에는 야근하는 듯한 피곤함

처음 몇 주는 좋았다. 낮에 혼자 카페를 가거나 전시, 영화를 보러 갈때면 마치 반차를 쓴 것 처럼 좋았다. 친구들도 부러워했다. 하지만 4시에 출근을 하고 나면 남들이 퇴근 후 휴식을 취하는 동안 나는 일을 하고, 새벽 1시에 아무도 없는 거리를 지나 퇴근을 한다. 택시들은 내가 야근, 또는 회식하고 귀가하는 직장인으로 보고 내 앞을 서성인다. 특히 금요일 저녁에는 가능하면 통화를 안잡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에게 '불금'은 사라졌다. 대신 주말의 여운을 좀 더 즐길 월요일 낮이 있긴 하지만,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좋은 점이 있는 만큼 단점이 커서 아주 밸런스가 잘 맞았다....^^ 

그 좋은 점에서도 아쉬운 마음이 점점 생겼다. 평일 낮에 평소라면 사람이 많을 문화 공간이나 카페를 다니는 큰 꿈이 있었지만, 너무 외출을 오래 하고 돌아오면 저녁에 체력이 너무 떨어져서 일이 힘들었기 때문에 큰맘 먹고 가끔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 사람이 없었다. 평일 낮을 다녀보면 낮에 자유로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그 중에서 내 친구는 없었다. 좋은 전시도, 좋은 식당, 카페도 나 혼자 가야되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리고 코로나도 한 몫 하긴 했지만, 저녁에 술약속이나, 하다못해 혼술마저 어려웠다. 1시에 퇴근하고 나면 맥주를 마실 체력도 없이 씻고 잠들기 바빴다. 

휴식에 대한 관점도 바뀌었다. 결국 반차나 월차, 휴가가 행복한건 평소에 일할 시간에 내가 쉬고있다는 감각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낮에 혼자 전시를 보고 카페를 가면서 반차 기분을 내며 행복해했지만, 이제는 놀랍게도 해가 지는 밤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이 쉬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4시부터 1시까지 일하면 해지는 모습을 볼 기회가 없어진다. 그러다보니 가끔 주말이나 휴가때 7시쯤 맥주 파는 카페에서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면서 맥주를 마셔야만 진짜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되었다. 사람은 정말 기묘한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사소한 몇 가지, 

낮에 개인 시간을 하게 되면서 발견한 사소한 몇 가지 점들도 적어보자면, 

  • 많이 탔다. 산책도, 운동도, 문화생활도, 이동도, 볼일도 모두 낮에 보니 휴가도 안다녀왔는데 그새 엄청나게 탔다.
  • 필름카메라의 현상 주기가 빨라졌다. 빛에 민감하다보니 밤보다는 낮의 사진을 많이 찍게 되는데, 낮에 쏘다니니 훨씬 빨리 롤을 소진하고 현상하게 되었다. 
  • 운동도 사람이 있을 때 해야 재미있다. 체육관을 가도 누가 오전 11시에 운동을 하겠는가. 오히려 새벽 출근 시간 전이면 몰라도. 텅 빈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건 재미가 없다. 

일을 하는 관점에서도 시차가 다르다는건, 

  • 가끔은 좋다. 그 쪽에서 연락이 오지 않는, 오롯이 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focus time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 가끔은 효율적이다. 통화로 의견을 교환하고 그들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작업을 해놓고, 다시 통화로 의견을 교환하고. 누군가가 쉬는 동안에 지구 반대편에서 누가 일을 해놓고 빠르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가끔 좋다. 
  • 그만큼 누가 무엇을 할 것인지가 명확히 의논이 되어야한다. 서로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미리미리 자신이 어떤 작업을 맡을지나, 내가 어디까지 하고 일을 그 사람이 마무리할 수 있도록 넘기는 지를 명확히 전달해주는게 좋다. 하다못해 어떤 파일에다가 작업중인지를 그 다음날 아침 받아봤을 때 모르면, 일을 진행하기가 어렵다. 
  • 누군가의 늦은 시간대, 혹은 이른 시간대에 통화를 하게 되면 꼭 감사함을 표하자. 시차 때문에 누군가는 늦게, 혹은 이르게 일해야하는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꼭 고마움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소하지만 그래도 배려해주려고 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훨씬 좋다. 

 

안녕 행복했던 낮 나들이들, 

 

 

 


결론 - 언제 일하든 일은 피곤하고 힘든가보다.

극단적인 시차 맞추기 생활이 끝나고 나서야 느끼는 점이지만, 이 부분은 절대 나만 타협하면서 될 일은 아니다. 최근에 매니저랑 통화를 하다가 자기도 사실 아침에 통화하는 것 보다 자신의 밤에 통화하는게 훨씬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내가 배려해서 모든 사람들과 나의 밤시간, 그들의 아침 시간에 통화를 해왔는데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꼭 배려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밤 통화를 받지 않을 요일, 또는 아침에 통화를 받아도 괜찮은 요일을 정해두는 것도 좋다. 매일 애매하게 저녁 11시 12시 10시 11시마다 밤 통화가 있는 것 보단, 화요일은 밤 통화가 있는 날로 정해두고 몰아서 받는게 훨씬 낫다. 

막상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결국 시간의 문제로 힘든 점들도 있지만, 결국 일은 언제 하든 힘들고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적응에 시간이 걸릴 뿐. 나처럼 극단적인 다른 시차 살이를 하는 경우가 아니여도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과 일을 해야하는 상황은 점점 늘어난다. 결국 이런 흐름 속에서 필요한건 스스로가 일할 때 집중해서 일하고, 쉴 땐 끊어내고 잘 쉬고, 일과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는지에 대한 능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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