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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의 책과 영화들, Best 3

24년은 생각보다 많은 책과 영화를 소비하진 못했다. 20권의 책을 목표로 했지만 19권에 그쳤고, 영화/시리즈도 19편으로 한 편도 보지 못한 달들이 여러 달 있을 정도다. 특히 영화는... 본 걸 후회하게 되는 작품들도 많이 봐서 베스트를 꼽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꼽아보는, 올해 나에게 가장 큰 영감과 영향을 준 최고의 작품들. 

 

책 - Filterworld

제품이 무료면 사용자 자신이 제품이라는 식의, 소셜 네트워크의 악영향에 대한 이젠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아닌, 알고리즘화된 미디어가 문화와 소비자의 취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Kyle Chayka의 <Filterworld>. 개인의 취향이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해서 궁금하고 관심이 많던 차에 읽어서 나에게 시기도 적절했고, 어느 도시에 여행을 가도 비슷해져가는 카페나 관광지의 분위기처럼 문화가 더 얕고 납작해져가는 현상 등 내가 실제로 체감해오던 문제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컨텐츠를 접하는게 너무 쉬워졌지만, 그만큼 모두가 같은 걸 보고, 비슷한 것들이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되고, 반면 새로운 걸 보고 느끼고, 깊게 파고들면서 취향을 확장해나갈 기회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결국 내 취향을 만들어가는 방법은 내가 의식적으로 궁금한 걸 파고들고 찾아보는 수 밖에.

 

 

책 - Life in code

올해 유독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책인 Ellen Ullman의 <Life in Code>. 컴퓨터가 개인이나 회사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던 시점에 개발자로 일을 시작한 그녀의, 기술에 대한 정말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생각과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인간과 감정, 그리고 기술과 논리는 반대의 선상에 있는 것 같지만, 이 에세이들은 결국 기술 또한 인간의 산물이며, 쓰고 영향을 받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주로 기술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쓰는 사람들,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경험은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다는걸 깨닫게 한다. 기술에 대한 개발자의 글이라고 하면 주로 기술에 대한 분석과 논리로 가득할 것만 같지만, 그 어느 에세이보다도 깊은 사유가 담겨있는 정말 좋았던 책.

 

 

책 - 삼체

SF 소설과 영화를 사랑하는 나. 빨리 그 다음 장이 보고싶어질 정도로, 텍스트에서 이런 박진감을 느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푹 빠져서 봤던 류츠신의 <삼체>. 작가가 참 대단한게, 묘사가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았음에도 텍스트를 읽으면 선명하게 이미지가 그려지듯이 읽혔고, 문화대혁명같은 중국의 역사의 장면, 궤도 역학의 삼체 이론, Dark forest theory같은 우주에 대한 가설 등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면서도 너무 뭐가 많다는 느낌이 아니라 모든게 유기적으로 잘 맞물려있었다. 두꺼운 책으로 3권짜리, 꽤 긴 이야기이지만, 뒤의 전개가 궁금해서 계속 넘겨보게 된다. 결말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인류와 시간을 한 발짝에서 떨어져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게 하는, 꽤나 흥미로운 우주 대 서사시. 

 

 

영화 - Pulp Fiction

사실 올해 본 영화들 중에 정말 별로거나 기억에 남지않는 것들이 많다. 그 중 단연 빛나는 건 역시 믿고 보는 옛날 명작... 쿠앤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킬빌을 너무 재미있게 봐서 보려고 예전부터 벼르던 영화를 이제서야 꺼내봤다. 이게 94년도의 영화라니, 지금봐도 너무나 세련되고 '이게 영화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흡입력. 자신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는 감독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구조 자체로 실험까지 할 때. 

 

 

다큐멘터리 - Score

영화에서 주로 주목을 받는건 감독이지만, 영화가 종합예술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요소 하나 하나를 뜯어보면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중에서도 영화 음악에 대한 이야기. 영화 음악이 단순히 배경음악으로써 빈 공간을 채우는게 아닌, 어떤 장치를 통해서 사람들의 시선과 감정을 이끌고 장면에 톤을 불어넣는지는 이 다큐를 통해서 처음 접했다. 그 방식이 꽤 디자인이나 브랜딩과 비슷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떤 상징적인 모티프를 만들고 그걸 변주하고 활용해서 사람들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어떤 의미와 감정으로 받아들인다는게 신기하고, 나에겐 추상적인, 시각적 요소 없이 소리로 그걸 한다는게 경이롭기까지 하다. 음악이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것처럼, 영화는 음악에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래서 영화 음악이 더 기억에 남고 사랑받는게 아닐까. 아, 이 예술들이 만나서 생기는 시너지들. 짜릿하다.

 

 

다큐멘터리 - Geoff McFetridge: Drawing a Life

내가 너무 좋아하는 아티스트 Geoff McFetridge에 대한 다큐멘터리.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참을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온라인에서 스트리밍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 <Her>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터페이스들을 디자인했고, Apple Watch 중 표정 모양의 워치페이스를 디자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모든 창작물은 그 창작자를 투영한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자신의 창작물을 위해, 살면서 어떤 순간들, 감정들, 영감을 포착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그 주파수에 맞춰서 사는 사람같다. 그의 작업들처럼 굉장히 힙하고 톡톡 튀는 사람을 상상했는데 오히려 수행자같은 모습이 의외였달까. 오늘 다시 봐야지.

 

Filterworld에서 말한 것 처럼, 내 취향을 넓히기 위해서는 내가 의식적으로 관심이 가는 것들에 대해 좀 더 깊게 알아보고, 관련된 다른 컨텐츠를 보기도 하면서 rabbit hole처럼 나의 지적 호기심을 따라가보고, 전혀 관심이 가지 않던 길도 한 번 가보고,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발견하는 재미를 즐기는 수 밖에. 올해도 더 많은 좋은 작품을 접하면서 나를 가꾸어 나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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