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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호크룩스같은 공간들
약 1년만의 서울. 돌아왔는데도 돌아온 게 실감이 나지 않는 며칠을 보내다가, 일주일차가 된 오늘에서야 내가 가장 사랑했던 카페, 앤트러사이트 합정점에 왔다.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안정감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크게 한 숨을 들이마셨는데, 여기에 두고 온 내 영혼이 들어온 기분이 들 정도로, 내 안의 무언가가 다시 채워진 기분이었다. 이 공간을 떠나있었던 시간이 무색하게, 내가 자주 앉던 그 자리에 앉으니 내가 있어야할 곳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바뀐 의자와 테이블의 높이, 위치는 묘하게 맘에 들진 않지만...) 이 말을 들은 친구 두 명이나 똑같이 그 카페가 니 호크룩스냐는 농담을 했다. 그 농담을 들으며 이 공간이 파괴되는 상상을 해보면..
10 - 봤던 영화, 드라마를 다시 본다는 건
요즘 고르는 영화마다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래서인지 보려고 담아둔 긴 영화 리스트가 아닌 봤던 영화인데 희미해져 가는 영화들을 다시 보고 있다. 최근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봤고, 지금은 '셜록'을 보고 있다. 아무래도 봤던 영화나 드라마를 다시 본다는 건 내가 정말 좋아했던 작품이라는 건데, 다시 보게 되면 전혀 기억하지 못했던 영화의 디테일을 다시금 새겨보게 되기도 하고, 이 작품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나는 어땠는지, 왜 좋아했을지, 그 영화를 다시 보는 이상으로 이런 저런 생각거리가 있는게 재미있다. 당당하게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유, 그 디테일들은 금방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걸 다시 선명하게 만들면서도, 그 때가 아닌 지금의 시점으로 다시 봐도 또 재..
9 - 헤어짐은 언제나 어려워
오퍼가 공식적으로 나오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빨리 받아야 퇴사 선언도 하고 이사 준비도 시작할 수 있어서 마음이 조급했는데, 막상 나오고 나니 모든 일이 서운할 정도로 일사천리다. 퇴사 선언이 밈처럼 홀가분하고 통쾌할 줄 알았는데, 만감이 교차한다. 이 이직이 옳은 선택일까, 적응이 된 이 울타리를 벗어나는게 긴장되고, 특히 약 3년을 함께 일한 팀원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그들의 서운하면서도 기쁜 표정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다른 사람들이 퇴사를 할 때 그 소식을 들으면서 괜히 싱숭생숭했던 그 기분을 선명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팀원들이 어떤 기분일지 이해가 가서 더욱 더 미안하다. 한 명은 심지어 울어서, 나도 울 뻔 했다. 이렇게 퇴사 선언이 홀가분하지 않을 줄이야. 이사 날짜도 일사천리로..
8 - 계절이 그리워
싱가폴의 날씨에 크게 불만을 가져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춥고 움츠러드는 시기가 없는 것에 감사했는데, 오늘 한국의 폭설 소식은 그 코 끝의 찬 공기와 사각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그리워지게 만들었다. 눈에 시큰둥한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다니, 친구들이 보내주는 사진에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고 놀랐다. 싱가폴의 영원한 여름 속에서 살다보니 이렇게 생각이 바뀌나보다.이제는 여행도 시원한 곳에 가야 정말 여행을 온 것 같고, 비슷하게 더운 휴양지에 가면 계속 싱가폴에 있는 기분이다. 보는 것, 먹는 것 보다도, 온 몸으로 느끼는 기온에서 새로운 도시에 왔다는 느낌이 제일 감각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까. 작년 5월, 멜버른에 갔을 때의 간만에 느낀 가을 바람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느껴졌던 것도,..
7 - 운동을 하는 것과 배우는 것의 차이
혼자 러닝을 한다던지, 복싱에 가서 혼자 샌드백을 친다던지, 혼자 묵묵히 그 날의 운동을 끝내고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싱가폴에 온 이후로는 그런 혼자 하는 운동 시간이 반, 코치가 하는 수업을 듣는 운동 시간이 반이다. 내가 사는 콘도에 테니스 코트가 있어서 레슨을 신청하면 코치가 직접 와서 수업을 해줘서 테니스도 배우고, 평소에 하던 복싱을 계속 하고 싶은데 싱가폴은 아무 시간대나 가서 시설을 쓰는 복싱장보다 정해진 시간에 수업을 신청해서 가야되는 식이라서, 복싱도 코치와 함께 하고 있다. 혼자 편한 시간에 가서, 조용히 생각 정리 하고 오는 맛으로 운동을 했다보니, 처음에는 운동을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미리 일정을 잡아서 가야하고, 옆에 계속 코치..
6 - 일상의 조각들
블로그 챌린지 하던 친구들이 포토덤프를 올리는게 좋아보였는데, 주말인 김에 갤러리에서 이번 주의 사진들을 모아 올려본다. 사실 요즘 모든 정신이 면접 준비에 가있어서 일상이랄 것도 없지만 그래도… 뭐라도 있겠지. 일상이 단조로워질수록 생각도 단조로워지고, 나의 표현도 단조로워진다. 책으로, 사람으로, 혼자 뭔가 만드는 시간으로 그런 단조로움을 채워오던 나였는데, 요즘은 그런 시간이 없으니 내 갤러리도 단조롭구나. 그나마 하늘을 올려다보고, 좋은 날씨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했던 나 칭찬해. 남은 며칠만 고생하고, 다시 내가 사랑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5 - 과거의 작업들을 돌아보며
포트폴리오와 인터뷰 준비에 대한 하소연으로 적어보는 오늘의 글. 최종 면접을 앞두고, 특히 이 회사에서 요구하는 ‘design craft’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잖이 고통을 받고 있다. 사실 의도 자체만 보면 왜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나 싶다. 이 인터뷰의 목적은 정제된 포트폴리오 프레젠테이션이 아닌 그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고려했던 옵션들, 선택되지 않은 디자인들, 그 이면의 고민과 노력에 대해 이야기해보라는 것이다. 처음엔 아, 그거야 쉽지, 라고 생각했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몇 번이나 열어봤던 프로젝트이지만,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건 전혀 다른 경험이다. 포트폴리오는 잘 된 부분만 하이라이트하면 되는데, 과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니 엉망인 부분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4 - 해외에서 친구만들기
돌이켜보면 싱가폴에 와서 가장 고생했던 부분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었다. 해외에 나와있는 지금도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꽤나 잘 유지하는 편인 내가, 친구 만드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처음에는 생각도 못했다. 일 관련해서 아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는 일은 오히려 어렵지 않은데, 가끔 밥먹고, 수다떨고 마음 편하게 속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 특히나 직장이나 학교 같이 자연스럽게 같은 공간과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데도 친구가 되는 일은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친구 사귀는 방법을 배운게 아닐까. 먼저 연락하고, 시간내서 만나고, 요즘 좀 뜸했나 할 때 또 연락하고. 확실히 어렸을 때의 친구 사귀는 과정과는 배경도, 방법도, 이유도 다르지만, 친구라는 건 계..
3 - 취향에 대하여
개인의 취향은 어떻게 생기는걸까. 취향이라는 많이 쓰지만 무엇이 개인의 취향을 형성하는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왜 이런 우중충한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으며, 무엇이 내 선반에 올라간 물건들을 고르게 만들었는지, 집에 둘 화분을 고를 때 마저도 어떤 식물은 마음에 들고 어떤 식물은 별로라고 생각하게 되는지 말이다. 어린 시절에 접한 것들부터 최근에 접한 것들, 가치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들이 다 맞물려서 나오는, 한 두 가지 이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내 안의 일종의 알고리즘에 의한 선택일 것이다. 최근에 'Filterworld' 라는 책을 읽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 같은 소셜 네트워크의 이면에 대한, 뻔한 이야기일 것 같아서 미뤄오던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이..
2 - 소비예찬
오랫동안 오븐 장갑과 주방용 손 닦는 수건이 없었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필요해도 잘 안사는 성격이라, 이사 초반에 열심히 마음에 디자인을 찾아다녔으나 못찾아서 결국 일반 수건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들어간 Marimekko 매장에서 너무나 맘에 쏙 드는 장갑과 수건 세트를 발견했다. 세트로 10만원이 넘는 가격에 한참을 망설였지만, 이게 아니면 내 평생 오븐 장갑과 주방용 수건을 못 살 것 같았다.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샀을 때의 행복과 희열이란. 사실 사와놓고 너무 아름다워서 한 번도 안쓰고 눈으로만 즐기고, 아직도 일반 수건에 손을 닦고 있다. 마음에 쏙 들 때까지 못 사는 나의 습관은 미련하기 그지없지만서도, 정말 딱 마음에 드는 물건을 샀을 때의 그 희열 때문에 그 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