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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수렴과 발산

Peace & Quiet

갈 대학이 정해진 수능 끝난 고3 정도의 순도 높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 바로 이직이 정해진 직장인의 입사 전. 2달 정도의 긴 시간을 허락받았지만, 어느새 한 달이 지나가버렸다. 그 한 달 중 2주는 송별회를 하고, 싱가폴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식사를 마지막으로 하며 인사를 나누고, 끝없는 짐정리를 하고 이사를 했고, 다른 2주는 한국에 돌아와 그립던 음식을 먹고, 간만에 친구와 가족들을 만나고, 밀린 병원을 다니는걸로 또 훌쩍 흘러버렸다. 이 기간 뭘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지 그렇게 고민했건만, 결국 뭘 해야겠다고 뾰족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이렇게 흘러보낼건가보다. 알차게 놀아야되는데 별거 못하고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나의 푸념에, '시간이 잘 가는 것 같으면 잘 놀고 있는거야' 라는 친구의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되던지.

 

남들은 다 여행을 다녀오라곤 했지만, 겨울 여행을 즐기지 않기도 하고, 유럽 가면 실컷 다닐 여행을 벌써부터 다니면서 힘과 돈을 쓰고싶지 않았다. 생각의 환기와 자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랬겠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건 초심찾기, 정확히는 새로운 걸 배우는 보람과 재미,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을 다시 되찾는 일인 것 같다. 이직 준비의 부담을 가지고 쥐어짜듯 작업을 한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을 한다는 데에 두려움과 걱정이,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 부담이 더 커져버렸고, 이직이 확정된 이후에도 꽤나 오랫동안 작업을 하러 앉아있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결국 그 방법은 새로운 걸 배우고, 내가 즐길 수 있는 무언갈 만들면서 나의 업을 즐길 줄 아는 나로 돌아가는게, 추상적이지만 절실한 남은 한 달의 목표다. 

 

무언가를 만드는 창작자에게, 나는 '수렴'과 '발산'의 시기가 주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믿는다. 수렴과 발산이라는 용어가 여기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갈 새롭게 배우고, 영감을 모으고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걸 나의 것으로 소화시키는 수렴의 시기, 그리고 그것들이 모이고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새로운 생각과 시도로 이어지고, 만든 것들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사람들과 연결되는 발산의 시기. 물론 하나도 수용하지 않고 만들기만 하는 시기, 또는 그 반대여야 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고, 수렴이나 발산 중 한 쪽이 주로 필요한 시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또 그 전의 수렴의 시기에 받아들인 것들이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또 다시 발산한 것을 토대로 수렴하는 시기가 찾아오는게 더 큰 도약을 위한 사이클 같달까. 그 사이클에서 나는 최근에 발산의 시기를 필요보다 오래 가져서, 이제 무언가를 만들 밑천이 다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부지런히 배우고, 영감받고, 사색할 시간이 나에게 필요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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