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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퇴사 회고. 전 직장에서 배운 것들

퇴사한지는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미뤄왔던 링크드인 업데이트. 퇴사 소식을 올리기 전에 조금 스스로도 생각을 정리하고 적어보려고 간단한 회고를 해본다. 

퇴사의 순간은 속박과 굴레를 벗어 던지고 행복으로 가는 기분일지 모르겠으나, 그저 다음 속박과 굴레로 가는 것일 뿐.... ㅎ

일에 대한 자세

코로나 때 일을 시작해서 1년은 한국에서 재택으로, 2.5년은 싱가폴로 옮겨서 일을 했다. 인턴쉽이나 임시로 했던 일들을 제외하고는 나름 첫 직장이었다. 첫 직장을 원격으로, 팀원들과 다른 시차에서 일하려니 내가 맞게 하고 있는지, 일을 배워야 할 때에 그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첫 1년이었다. 줌으로 미팅을 할 때면 모두가 할 말이 있고, 다 우리가 뭘 해야하는지 '정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모르는 것 같았다. 원격으로 일하니 각자의 생각과 노력의 과정이 보이지 않으니 더 그랬고, 나에겐 모든게 처음이었기에 모두가 나보다 나은게 당연했는데도, 자꾸 위축되고 내가 하는 말과 작업에 자신이 없었다. 프로젝트를 같이 했던 한 팀원이 연말 평가 때 좋은 아이디어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감이 부족한 것 같다고, 스스로에게 충분히 믿음을 가지고 일하면 좋겠다는 말을 해준게 아직까지도 참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싱가폴에 가서 팀원들과 같은 도시에서 만나서 일을 하고,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가고 어울리게 되면서 그런 불안감이 사라져갔고, 일을 대하는 태도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가장 크게 깨달은 건, 나보다 높은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오래 일한 사람들도, 결코 일에 대해 '정답'을 알고 있는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회의 때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의 노력, 고민, 또는 하소연을 보고 공유하게 되면서 '아 이 사람들도 다 모르는구나, 결국 우린 다 같이 고민하고 함께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구나' 라는 생각에 부담감을 덜어놓고 비로소 함께 일을 하는 방법을 배운 것 같다. 내 의견을 공유하고, 함께 다듬어가고 만들어가는 과정의 재미를 느끼니 좀 더 자신감있게 일했고, 재미있게 일했다. 

 

사람이라는 자산

돌이켜보면 사람 복이 있었다. 팀원들과 매니저가 나를 믿고 점점 더 큰 롤이나 프로젝트를 맡겨줬고, 나도 그들을 믿게 되니, 내가 모르는 부분과 불안한 부분에 대해서 숨기고 혼자 끙끙대는 나쁜 습관을 조금이나마 고칠 수 있었다. 경력에 비해 금방 승진한 것도 주변에서 계속 더 큰 기회를 줬고, 도와줬고, 심지어 승진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때 옆구리를 찔러주는 좋은 선배들이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팀원이 되어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해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즐겁게 지냈다.

미국 회사에서 일을 잘 하려면, 열심히 일하고, 잘 하는 것 보다도 '소셜' 해야한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해줬었다. 그리고 인턴 때의 나는 그걸 정말 참 못했다. 대화도, 사람 관계도, 내가 의식적으로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팀에서는 그런 부담 없이 주변 사람들이 정말 좋으니 내가 자연스럽게 먼저 다가가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좋은 관계는 일의 분위기와 효율로도 이어져서 필요한 부분에 도움과 조언을 더 자연스럽게 받게 되고, 이 사람이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 아닌 함께 일하는 동료라는 생각에 더 자신있게 의견을 나누게 되는 좋은 기반이 되어주었다.

예전에는 미국 회사에서 '소셜'해야 한다는게 사회생활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사교적으로 보여야한다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내가 평소에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듯, 회사에서도 친구 만들듯이 사람들과 알아가고 가까워지고, 그 관계를 토대로 일 할 때 다양한 정보와 의견을 구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함께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걸 깨닫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새 회사의 분위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굳이 꾸며내지도 말고, 굳이 누군과 의식적으로 친해지려고 하지도 말고, '나 자신'으로 행동하면서 천천히 쌓아가자. 

그리고 외로울 수 밖에 없는 해외 생활, 그리고 하루의 1/3을 차지하는 회사 생활, 이왕이면 회사에서 좋은 친구를 만들면 여러모로 좋다. 이번 싱가폴 생활을 청산하면서 우리 집에서 송별회를 하는데 20명이나 와주고, 퇴사한 지금도 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아 내가 그래도 사람은 많이 얻었구나, 정말 뿌듯하다. 새 회사, 새 나라에서도 좋은 친구 많이 만들길. 

 

일 말고 업

선행팀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업'에 대한 가장 큰 배움은, 눈 앞의 제품과 기술이 아닌 큰 그림과 기회를 생각하는 자세가 몸에 배인 것, 개발자들과 가깝게 일하고 기술을 그들의 업무로 선을 긋는게 아니라 같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 디자인을 화면상의 정적인 벡터로 대하지 않고, 직접 프로토타입해보고 테스트하고, 사용자에게 의도를 전달하고 입력을 받아 기능을 동작하는 '인터랙션'으로써 대하는 디자이너가 된 것. 회사에서 했던 업무들에서 재미있는 부분들을 개인 프로젝트로 계속 이어서 하면서, 아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건 이런거구나, 좀 더 내 관점과 내 강점에 대해서 뾰족하게 다듬어 나갈 수 있었다. 

새 팀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면 새롭게 배워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겠지만, 이전 회사를 다니면서 쌓은 내 강점과 관점들도 꼭 잘 살려보길. 

 

자 이제 링크드인 쓰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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