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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미술관 기행 - Sir John Soane Museum과 V&A East Storehouse

매주 주말 최소 1개의 전시나 미술관을 다니는 요즘. 그 중에서도 너무 좋았던 미술관 하나와 정말 실망했던 미술관 하나가 있는데, 이 둘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흥미로운 것 같아서 묶어서 남겨보는 후기. 

 

시간이 멈춘 듯한 독특한 콜렉션 - Sir John Soane Museum

정말 좋았던 미술관은 Sir John Soane Museum. 건축가이자 수집가였던 John Soane의 유언을 따라 그의 집을 그가 생전 콜렉션을 보관해둔 대로 복원해서 대중들에게 개방을 했다. 그가 참여한 건축 프로젝트의 건축 모형부터 다양한 조각과 그림들이 집안 가득 채워져있다. 말그대로 집안 가득. 일반적인 미술관처럼 미술 작품들을 하나 하나 보기 좋게 '진열' 해둔 것이 아니라 거의 그 집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닥다닥 벽이나 좁은 공간에 채워두었다. 작품 하나 하나도 흥미로운게 많았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그 공간 자체가 주는 경험이 너무나 컸고, 그 밀도, 그 좁은 복도에서도 다양한 미술 작품으로 둘러싸이는 그 경험이 정말 황홀했다. 오래된 조각들, 그림, 스테인드 글라스, 그리고 집의 가구들까지, 그 시대의 집까지 최대한 원래대로 복원을 해서, 이 곳만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Best Offer인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미술품이 가득한 저택의 풍경을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달까.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 돔인데, 돔 아래로 건물의 여러 층들이 트여있고, 돔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극적인 무대 연출 효과를 낸다. 그 아래의 조각상들도 하나하나 독특한 배열로 붙어있는데 이 다양한 조각품 컬렉션을 공간을 통해 한 '장면'으로 디자인해냈달까. 가장 지하층에서 올려다봤을 때 나를 내려다보는 조각상들의 얼굴, 아마도 기둥의 일부였을 것 같은 건축물 조각들, 다양한 조각들이 모여서 이루어내는 시각적 화음이 이 돔 뿐만 아니라 집안 가득 차있어서 흥미롭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찾아보니 복원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도 유튜브에 올라와있어서, 일단 한 편은 봤는데 나머지 편들도 보고, 다음에도 또 갈 예정. 런던에 친구들 올 때마다 이 곳은 꼭 데려가고 싶을 듯. 

 

미술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는 창고식 미술관 - V&A East Storehouse

정말 실망한 미술관은 갓 오픈한 따끈따끈한 신상, V&A East Storehouse. 이케아의 웨어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엄청난 규모의 공간에 본 미술관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소장품들을 전시해두었다. 컨셉에 충실하게 모든 작품들이 창고 선반에 고정을 위한 나무 판자에 붙어있고, 설명도 많지 않고 작품 번호가 있어서 그걸 웹사이트를 통해 찾아보는 방식이다.

이 공간이 실망스러웠던 이유는, 공간의 컨셉에만 너무 집중을 해서 전시를 보는 내내 그 작품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작품들이 명확한 기준으로 같이 진열되어있는 것도 아니여서 맥락이 전혀 없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만한 사진은 많이 찍을 수 있겠지만, 미술 작품들이 컨셉을 위해 이용된 느낌이지, 미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아니다. 몇 작품을 묶어서 맥락을 부여한 공간들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한 선반 한 칸당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들끼리 연관성이 있는 것도 아니여서, 마치 전시 자체가 거대한 인스타그램이어서 컨텐츠를 얕게 스크롤하고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디렉터 인터뷰를 찾아보니 소장품의 정말 소수만 큐레이션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미술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이런 공간을 기획하게 되었다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보는 미술 작품이 의미가 있을까. 단순히 미술 작품을 보이는 곳에 두는 걸로 접근성을 높였다고 할 수 있을까? 

 

미술 작품들을 모여 화음이 되는가, 노이즈가 되는가

이런 생각으로 굉장히 뚱한 채로 전시를 후루룩 보고 나왔는데, 결국 내가 이 전시에 대해 싫어한 점이, 결국은 내가 Sir John Soane Museum을 좋아했던 이유와도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둘 다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감상할 수 있는 진열을 하기보단 다양한 미술작품이 모여 한 공간의 컨셉과 경험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는 꽤 비슷하다. 하지만 이 둘의 차이점은 Sir John Soane Museum은 그 미술품들의 배치를 통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냈고, 다양한 미술품들의 조화와 화음을 추구했지만, V&A East Storehouse는 미술품들의 맥락을 지우고 한 곳에 모아두면서 작품들이 유기적으로 모여서 시너지를 내는게 아니라 서로를 노이즈가 되도록 만들어버린 듯 하다. 둘 다 다녀오면 좋았던 몇 작품이 떠오르는게 아니라 그 공간 자체의 경험이 떠오르지만, 하나는 '예술의 시공간으로 몰입'하는 경험을 제공하고, 하나는 그저 '창고식 미술관'이라는 그 컨셉 자체만 얕게 경험하고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V&A East Storehouse는 요즘의 미술 소비 방식을 잘 대표하고 보여주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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